김지태 친일파 프로필 가족 후손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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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8. 1. 01:15
김지태는 1908년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난 그의 집안은 부산에서 12대를 살아왔는데 조부 김채곤은 통도사 신도회장을 맡았을 뿐 아니라 육영제(育英齊·부산진초등학교 전신)라는 학교를 세울 정도의 재력가였다.
김지태는 1927년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일제 수탈의 핵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에 입사하였다.
김지태는 1932년 폐결핵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퇴사하였다. 이는 친일파라는 의혹의 시발점이자 반론으로 함께 제기되는데, 김지태가 부를 쌓은 기초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2만평 토지 불하였다는 점, 한편으로 5년밖에 되지 않아 중도퇴사 직원을 적극적 친일파로 보기에는 무리라는 것이다.
조선섬유한국생사(주) 사장, 부산상공회의소 초대회장, 부산일보 사장, 경남육상경기연맹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무소속으로 제2대 민의원, 1954년 자유당 소속으로 제3대 민의원을 역임하였다.
김지태 그의 자본가로서의 시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장에게 인심을 얻어 동경의 본사와 의논하여 불하받은 울산의 땅 2만 평을 이용해서 자본가로 직업을 바꾼다. 인조견을 생산하는 직물공장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나 얼마 못가 실패한다. 이후 제지업에 진출하여 지류제조, 지류무역, 부동산업 등으로 인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해방 후 조선견직(전 아사히 견직), 삼화고무, 제사업 등을 주축으로 전국적인 자본가로 성장하였다.
1949년 부산일보를 인수하였다. 1958년 부일장학회를 설립하였고, 1959년 부산문화방송을 개국하고, 1961년 문화방송을 개국하였다.
김지태는 1954년 12월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다가 자유당 해당 행위자로 제명되었으며, 1957년 5월에 복당했으나 1958년 5월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60년 4.19 민주혁명 당시 부정축재자 명단 1호에 올랐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직후에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1961년 12월 30일 부정축재 환수금으로 5억 4570만 환을 냈다.
그 후에 1962년 5월, 다시 국내재산도피방지법, 관세법 및 형법, 농지개혁법 위반 혐의로 박정희 군사정부의 군검찰로부터 징역 7년을 구형받았는데, 같은 해 6월 20일 구속된 상태에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및 부일장학회 소유의 부산 시내 땅 10만 147평을 5·16 장학회에 무상기증한다는 기부 승낙서에 서명하고 날인하였다. 그리하여 6월 22일 공소취소로 석방되었고 5·16 장학회는 1982년에 박정희 대통령 및 영부인 육영수의 이름을 한글자씩 옮긴 정수장학회가 된다.
유족은 기부과정의 위법성을 주장하면서 정수장학회에 주식 반환 청구 소송을 수십년동안 진행했으나, 2012년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7부(염원섭 부장판사)는 "국가도 과거 군사정부가 자행한 강압적 위법행위에 대해 배상책임이 있다. 하지만 이 역시 10년이 훨씬 지나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이유로 강압적 기부는 인정했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인해 소송을 기각하면서 일단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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